여자 복이 많다

2020년 10월 19일 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었다.
축구부로 유명한 근처 학교의 축구부 코치님이 점심시간에 축구하는 나를 불러내시더니
자기네 학교 축구부에 들어올 생각 없냐고 물어보시고는,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축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제안했었다.

내가 운동을 좋아하고 곧잘 한다는 것을 어머니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꽤 진지하게 고민하셨던 것 같다.
그런데 내 인생의 방향을, 유명한 꽃보살(무당)에게 물어보셨다고 한다. (불교 신자인 친척 분이 소개해주셨다고)
그 결과, "운동선수 시키면 다치니까 절대 시키지 말라"고 했다는데,
지금껏 살아 보니 정말 맞는 말이었다. 나는 축구를 하면 3번에 1번꼴로 부상을 당했다.

나의 부상 히스토리 (펼치기)

  • 고3 때 축구 하다 넘어져서 손목 인대를 다쳤고, 손목에 깁스한 상태로 축구를 하다가 정강이가 부러져서 3개월 동안 통깁스
  • 군대에서 전역한 지 한 달 만에 축구하다가 왼쪽 무릎 연골 파열. 그 뒤로 5년 동안 운동을 할 때 쇠가 박힌 무릎 보호대 착용
  • 24살에 테니스 치다가 오른쪽 어깨 회전근 파열. 어깨 물리치료만 3년 넘게 했지만, 어깨는 거의 고장 난 상태
  • 결혼식을 한 달 앞두고 축구하다 발목이 심하게 꺾여 한 달간 통깁스, 결혼식까지 다 낫지 않아서 결혼식장에서는 절뚝이며 신랑 입장
  •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축구하다 넘어져서 다친 오른 손목을 방치했다가 염증이 심해져서 보호대를 차고 있다.
    (+ 심지어 메모장에 쓴 이 글을 블로그에 옮겨쓰고 있는 지금은, 또 축구를 하다가 발목을 다쳐서 보호대를 차고 소염제를 먹고 있다.)

운동 선수하면 다치니까 하지 말라고 한 그 꽃보살이 정말 용하긴 했나 보다.
그런데 그 꽃보살이 했던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여자 복이 많다"고 한 것이다.
‘수사슴 한 마리가 나무 그늘 밑에서 쉬고 있고, 그 주변에 여러 암사슴이 돌아다닌다’라고..

이 말을 전해 들은 것은 고등학생 때였는데,
나는 남중 남고를 졸업하고 체대에 입학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주변에 남자들만 득실거려서 이 부분은 틀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지금의 와이프와 연애한 지 5년이 넘어갈 무렵,
내가 잠시 한국에 없는 사이에도 우리 외할머니가 혼자 사시던 집에 찾아가서,
외할머니와 같이 시간을 보내주는 와이프를 보면서 나는 결혼을 결심했었다.

그리고 그 꽃보살이 말한 여자 복이 많다라는 것이,
여자가 많은 게 아니라 정말 좋은 여자와 결혼하게 되기 때문에 여자 복이 많다고 한 것이라고 쉬이 생각하게 되었고,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오늘, 여자 복이 많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를 깨달았다.

오랜 재택근무 끝에 출근한 월요일,
엄마와 외할머니(이하 할머니)가 같이 사시는 집에서 김치를 가져갈 생각으로,
할머니께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고 말씀드렸고, 할머니는 기뻐하시며 기다리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퇴근하고 다소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할머니에게 갔다.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맛있는 저녁을 먹고,
치킨 반 마리를 에어프라이어에 익혀서 할머니는 빨간 소주, 나는 캔맥주와 함께 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할머니께서 엄마가 서운하게 한 점들을 말씀하시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시고 서글퍼하셨다.

할머니는 나와 가장 친하고, 나를 가장 좋아하신다.
보통의 할머니 세대가 딸보다 아들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누나가 대학에 입학해서 누나 방을 물려받을 수 있게 된 고등학교 2학년 때 까지, (방이 없어서) 나는 할머니와 거실에서 함께 지냈다.
엄마가 일을 하셨기 때문에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밥, 할머니가 해주신 빨래, 할머니가 청소하신 집에서 살았다.
엄마가 아빠 역할을, 할머니가 엄마 역할을 하셨기 때문에 할머니는 내 엄마와 다름없기도 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밖에 나가서는 할 수 없는 말들이지만
본인의 마음 안에서 계속 커지는 서운함과 노여움을 이렇게 가끔 나와 단둘이 있을 때 푸시곤 한다.
대부분 엄마의 잘못도, 할머니의 잘못도 아닌 상황이기 때문에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옆에서 잘 들어드리고, 안아드리고, 할머니 속에 뭉친 응어리를 온전히 쏟아내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여러 차례 눈물을 흘리셨고, 서글퍼하셨고, 나는 할머니 술잔을 채워드리면서,
할머니 옆에 앉아 등을 쓰다듬으며 위로를 해드리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아차! 내가 출근한 뒤 12시간 넘게 생후 50일이 막 지난 딸을 혼자 보고 있던 와이프의 전화였다.
언제 오냐는 질문뿐인 통화였지만, 와이프가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누구라도 생후 50일 된 아기를 12시간 동안 혼자 본다면 넋이 나갈 정도로 힘들 것이다.
할머니도 이제는 많이 풀어지셨는지 본인이 별소리를 다했다면서 빨리 가보라고 하셨다.

할머니 집을 나서서 다시 버스정류장에 가는 길에, 와이프의 카톡이 여러 개가 온다.
조금 더 자기를 배려해줬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백번 천번 맞는 말들뿐이어서 미안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17평짜리 작은 집에서, 미세먼지가 많아 창문도 열지 못하는 날에,
12시간 넘게 50일 된 딸아이를 돌보느라 정신과 신체가 피폐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나도 아이를 혼자 2시간 정도 돌본 적이 있었는데, 어우….

그렇게 와이프에게 미안하다는 카톡을 여러 번 보내면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우리 가족이 서울에서 안양으로 이사 와서 처음으로 살았던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일년 내내 크리스마스를 기다려온 8살 나에게,
교통사고를 당하신 아빠는 선물 대신 슬픔을, 크리스마스 트리 대신 장례식장 국화 꽃을 보여주셨다.
그 후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봄에, 엄마, 외할머니, 누나, 나 이렇게 네 가족은 안양으로 이사를 왔다.

이사 와서 아둥바둥 열심히 살던 기억을 스쳐 지나가는데,
여자 복이 많다는 그 꽃보살의 말이 떠올랐다.

엄마, 외할머니, 누나, 와이프, 딸

정말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다 여자였다.
코로나로 생활 반경이 좁아지면서 더더욱 가족 외에는 만나지 않는 삶이 되다 보니,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아, 여자 복이 많다는 것. 나무 그늘 밑에 수사슴과 그 주변에 암사슴들이 많다는 것. 꽃보살이 말한 그대로구나.
여자 복이 많다는 것의 여자는, 모르는 여자들이 아니라 내 가족들이었구나. 내 삶 자체였구나.’

이제야 뒤틀려있던 퍼즐 조각 하나가 맞춰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가 여자 복이 많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나무 그늘 밑에 쉬고 있는 수사슴이 된 것 마냥, 버스에 앉아 창밖을 보는 내내 행복한 기분이 이어졌다.

그렇게 집에 가서는, 웃는 얼굴로 와이프에게 고생했다고, 미안하다고, 어서 좀 쉬라고 말하면서 아기를 받아 안았다.
약 2달 만에 월요일 출근이라 내 몸도 천근만근일 법 한데, 이상하게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힘이 났다.

내가 사랑하는 다섯 여자.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다섯 암사슴.
모두가 평생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